해남윤씨 귤정공댁 이야기

[연보] 15세기 중반 ~ 17세기 말 : 250년

pagoda04 2026. 3. 8. 10:0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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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악문헌(棠岳文獻)해제에 기록된 주요 사건과 인물의 행적을 일자 및 연도순으로 정리해 드립니다.

 

15세기 ~ 16세기 초반

1476(성종 7): 어초은 윤효정(尹孝貞) 출생.

1495(연산군 1): 귤정 윤구(尹衢) 출생 (윤효정의 첫째 아들).

1505(연산군 11): 해빈 윤항(尹沆) 출생 (윤효정의 둘째 아들).

1508(중종 3): 졸재 윤행(尹行) 출생 (윤효정의 셋째 아들).

1512(중종 7): 행당 윤복(尹復) 출생 (윤효정의 넷째 아들).

1513(중종 8): 귤정 윤구가 생원시에 합격함.

1516(중종 11): 윤구가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함.

1519(중종 14): 기묘사화로 윤구가 삭직되었으며,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남.

1524(중종 19): 낙천 윤의중(尹毅中) 출생 (윤구의 둘째 아들이자 윤선도의 조부).

1531(중종 26): 윤행이 문과에 합격함.

1534(중종 29): 윤복이 생원이 됨.

1538(중종 33): 윤구가 복직되었으며, 윤복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함.

1540(중종 35): 윤홍중(尹弘中)이 생원시에 합격함.

1543(중종 38): 윤효정 사망. 윤의중이 진사가 됨.

1546(명종 1): 윤홍중이 별시문과에 급제함.

1547(명종 2): 윤복이 부안현감을 지냄.

1548(명종 3): 윤의중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함.

1549(명종 4): 윤구 사망.

 

16세기 중반 ~ 후반

1551(명종 6): 윤유심(尹唯深) 출생 (윤의중의 큰아들이자 윤선도의 생부).

1552(명종 7): 윤복이 낙안군수가 됨.

1554(명종 9): 창주 윤유기(尹唯幾) 출생 (윤의중의 아들이자 윤선도의 양부).

1559(명종 14): 귤옥 윤광계(尹光啓) 출생.

1565(명종 20): 윤복이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이황과 교유함.

1572(선조 5): 윤홍중 사망.

1573(선조 6): 윤복이 충청도관찰사를 지냄.

1576(선조 9): 윤유심과 윤유기가 나란히 생원시에 합격함.

1577(선조 10): 윤복 사망.

1580(선조 13): 윤유기가 별시 병과에 급제함.

1581(선조 14): 윤의중이 형조판서에 오름.

1585(선조 18): 윤광계가 생원이 됨.

1587(선조 20): 고산 윤선도(尹善道) 출생.

1589(선조 22): 윤의중이 정여립의 옥사(기축옥사)에 연좌되어 삭출됨. 윤광계가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함.

1590(선조 23): 윤의중 사망.

1591(선조 24): 윤항 사망.

1592(선조 25): 윤행 사망.

1594(선조 27): 1113, 윤유기가 행병조정랑을 제수받음.

 

17세기 (고산 윤선도 시기 중심)

1601(선조 34): 윤광계가 주서 세자시강원설서를 지냄.

1603(선조 36): 윤광계가 호조정랑으로서 역대실록 재간에 참여함.

1606(선조 39): 10, 오익창 등이 윤의중의 관직 회복을 청하는 상소를 올림. 윤광계는 평안도도사가 됨.

1610(광해군 2): 윤의중이 복관됨. 윤유심과 윤유기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림.

1612(광해군 4): 윤유심 사망.

1616(광해군 8): 윤선도가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으나, 이로 인해 윤유기가 파출되고 윤선도는 경원으로 유배됨.

1619(광해군 11): 윤광계 및 윤유기 사망.

1623(인조 1): 인조반정으로 윤선도가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됨.

1628(인조 6): 윤선도가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대군들의 사부가 됨.

1631(인조 9): 윤선도가 양부 윤유기의 묘를 해남으로 이장함.

1633(인조 11): 윤선도가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함.

1634(인조 12): 윤선도가 성산현감으로 좌천됨.

1635(인조 13): 윤선도가 파직되어 양전의 문제를 논한 을해소를 올림.

1638(인조 16): 병자호란 이후 왕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영덕에 귀양 감.

1644(인조 22): 윤선도가 갑신소를 올림.

1649(효종 즉위): 윤선도가 효종에게 기축소를 올림.

1652(효종 3): 윤선도가 동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, 원두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.

1658(효종 9): 정개청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는 국시소를 올림.

1660(현종 1): 417, 자의대비 복제 문제를 논한 논례소를 올려 삼수로 유배됨.

1661(현종 2): 4, 유배지에 있는 윤선도의 처우에 대해 조정에서 심리함.

1665(현종 6): 3, 윤선도가 광양으로 이배됨.

1666(현종 7): 7, 윤선도가 특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남.

1667(현종 8): 8~9월경 윤선도가 해남으로 돌아와 부용동에 정착함.

1671(현종 12): 윤선도 사망. 허목이 신도비문을 지음.

1672(현종 13): 윤선도가 복관됨.

1673(현종 14): 영릉천개 사건이 일어남.

1674(숙종 즉위): 2월 인선대비 승하로 다시 복제 문제가 거론됨.

1675(숙종 1): 윤선도가 이조판서에 증직됨.

1678(숙종 4): 8, 손자 윤이석이 상소하여 윤선도에게 시호가 내려졌으나, 이후 다시 삭탈됨.

1689(숙종 15): 223, 우의정 김덕원의 계로 윤선도의 관작과 시호가 최종 회복됨.

1690(숙종 16): 유생들의 상소로 윤선도를 기리는 서원을 건립하라는 명이 내려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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